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미군 참전과 역할 (문단 편집) == 미 육군의 한국전선 전개와 활동 == 맥아더 장군은 "불이 났을 경우 화재진화 우선순위가 1~4번까지 있는 상황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4번 지역에서 불이 났다고 해서 1번 지역에 사용될 화재진압 장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였다. 미국의 전략사상은 그동안 최우선 순위를 [[서유럽]]으로 하였다. 미국에서는 서유럽을 '사활적 이익지대'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2위가 [[중동]], 3위가 [[극동]]이었다. 맥아더는 극동군 투입 외에 1번 지역인 서유럽 등의 병력의 전용을 말한 것이다.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미국이 어느 지역에서든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행위에 어떤 명백한 선을 그어야 하는데, 바로 그 지역이 한국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소련이 미국과 싸우려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미국의 결의를 시험해 보는 행위로 볼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참고로 브래들리 장군은 1950년 9월에 [[원수(계급)|원수]]로 진급했다. 6.25 전쟁은 시기상으로 미군 역사상 최후의 원수가 배출된 전쟁이기도 하다. 물론 브래들리 장군이 2차대전의 영웅이라는 점이 더 크게 작용했을 테지만 적어도 시기상으로는 6.25 전쟁이 최후의 원수를 배출한 전쟁이다. 어찌 되었거나 지원 병력 규모가 문제였는데 맥아더는 극동지역의 최고 책임자이면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데 위치한 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침공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한국 측의 끊임없는 6월 24일 또는 25일 남침 정보보고를 무시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하지만 이건 미 정부에서도 예상 못했다고 쉴드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넘어가는 편이며, 미국 군사전문가들이나 장성들이 맥아더를 까는 논지는 주로 북한군을 과소평가하여 병력을 축차투입했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축차투입과 지상군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 최초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한 이후에는 "현재의 전선을 고수하고 차후에 빼앗긴 땅을 다시 찾을 능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지상군의 규모는) 미 1개 전투단 및 2개 사단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불과 며칠후인 7월 5일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가 [[오산 전투]]에서 [[박살]]나자 깜놀하여 "북한군은 전차로 증강된 잘 훈련된 병사로 구성되었으며, 북한군의 장비 중에는 미군의 것보다 우수한 것이 있으며, 적 지휘관의 지휘능력도 뛰어나다. 북한군을 저지하고 격퇴시키기 위해서는 완전 편성의 4개 사단 내지는 4.5개 사단, 1개 공수연대전투단, 1개 기갑부대가 필요하다."라고 하였다. * 꼴랑 3일후인 7월 8일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에게 보고받은 후에는 "한국의 사태는 매우 심각하며 그곳에는 이미 대규모 작전이 전개되고 있다. 나는 전에 요청한 병력에 부가해서 모든 지원부대를 갖춘 4개 사단의 병력이 지체없이 모든 가용한 수송수단을 이용하여 투입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콜린스 참모총장에게 1개 야전군 사령부와 8개 보병사단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매우 빠르게 맥아더가 생각을 수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대규모 병력이 필요하다고 빠른 요청을 한 것을 보면 맥아더가 여기서 비판을 받는 것은 약간 억울할수도 있다. 맥아더가 비판점을 받는 주요 원인은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상륙병력을 확보하려고 낙동강 방어선에 병력을 투입했다가 뺐다가 한 점이다. * 8야전군, 1군단, 1기병사단, 2·24·25사단, 5·29연대전투단, 6개 기갑대대로 구성된 미 육군 4개 사단과 유엔군 + 한국군의 방어선에서 북진하는것 보단 손쉽게 올라가기 위해 허리를 끊기 위한 인천상륙작전 기간인 1950년 9월 15일부터 10월 17일까지 32일동안 미 2개사단과 1개 독립연대전투단을 전개하였다. 구성은 미 9·10군단, 1해병사단, 7사단, 187 공수연대전투단. * 중공군 개입한 1950년 12월에는 미 3보병사단 전개 * 1951년 12월에는 40 주방위보병사단, 1952년 1월에는 45 주방위보병사단을 전개하였다. 물론 맥아더가 원하는건 만주에 핵폭탄 쏘고, 대만군으로 중국을 남쪽에서 진격하는 등 제3차 세계대전 지휘권이었지만 다행히 트루먼 대통령과 전쟁지휘부는 맥아더의 폭주를 제지하였다.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은 [[미8군|제8군]], 1·9·10군단, 1기병사단, 2·3·7·24·25·40·45 보병사단, 1해병사단, 5·29보병연대전투단, 187공수연대전투단, 80개 보병대대, 54개 포병대대, 8개 기갑대대라는 미군의 총 지상 전력의 절반 이상을 한반도에 전개하였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미국이 병력충원을 상당히 늦게 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평시 상황에서 가용 병력의 상당수가 유럽등 빼낼 수 없는 곳을 지키는 상황인지라 예비군을 동원하고 부대를 다시 현역으로 만드는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며 예산의 한계도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안그래도 상태 안좋은 주일미군의 미 육군은 전선에 투입되자마자 개박살나기 시작한다. 허우대는 멀쩡해서 사단이라고 불릴 뿐 전투 몇 번 겪고 나면 그나마 다른 부대 인원을 뺏어서 채웠던 부대 인원이 다시 66%까지 감소한데다가 보충병까지 간헐적으로 조금씩 오니 [[KATUSA]]란 명목으로 막 입대한 한국 민간인이 수천명이나 들어가서 부대의 인원의 33%를 차지할 지경이었다. 그냥 각 부대의 제3부대는 모조리 한국인이었다. 3개 부대가 있으면 1개 부대는 한국인이 거의 100%라는 소리다. 그나마 초반에 인원이 93%를 채웠던 29연대는 훈련도 제대로 못마친 상태에서 경상남도 하동 방면에 무작위로 급하게 투입되었다가 개박살난 후 역시 한국에 투입된 다른 미군 사단처럼 인원이 절반까지 날아가서 KATUSA로 인원을 채우는 사태가 발생한다. 심지어 낙동강 전선이 한참 불타던 시기에는 KATUSA를 포함한 보충병 받은 숫자보다 전선에서의 사상자가 더 많은 날이 매일 있다시피 했고 미군의 각 사단들은 부대의 껍데기라도 유지하기에 바빴다. 상황이 이러니 낙동강 방어선에서 그냥 서울로 재진격하는 안이 미국에서 검토한 결과 1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북한군이 붕괴되지 않으며 지속적인 전투만 일어난다고 기각된게 다 이유가 있다. 이런 결정은 전쟁초에는 북한 병력만으로도 19만이고 [[국공내전]]을 통해 실전경험이 풍부한 팔로군 출신 조선의용군만 3개사단이였다. 그런데 앞의 미군이 투입될 무렵, 그러니까 인천상륙작전 시기에는 극심한 병력 소모로 북한군 출신은 겨우 5만명 밖에 안남았은 걸 감안한 상태에서 나온 결론이다. 그러므로 2차대전을 승리한 천하제일 미 육군 따위는 6.25 전쟁 시점에서는 사실상 없던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에 더해서 개전 직후의 지연전부터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타격이 너무 심해서 북진작전 말기까지 한국에 투입된 미 육군의 전투력은 실질적으로 별로 개선되지 못했다. 전투경험이 쌓일 만하면 사상자 발생으로 도로 줄어들고 부대 내부는 항상 신참 + 보충병 + 한국인이 넘치니 말만 미군부대지 숙련도 면에서는 급조하거나 재건한 한국군 사단과 별 차이도 없었다. 이래서 중공군 개입 당시 심각한 타격을 입고 고위 장교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문제는 중공군이 개입한 후 1.4 후퇴를 한 후에 다시 반격해서 중공군의 1951년 5월 공세를 이겨낸 후 전선이 고착화된 이후에나 본토에서 보충병력을 제대로 받아서 미국 사단을 다시 미국인으로 대부분 채우고 KATUSA는 다시 모아서 1951년 4월까지 32000여명을 다시 한국군으로 재배속해서 한국군 신편사단을 만들어서야 해결난다. 그 이전에도 북진 작전 개시 직전에 한반도에 전개된 미군 사단에서 잠시동안 KATUSA의 숫자를 줄이고 미군 보충병을 더 넣으려고 했으나 곧 병력이 부족해져서 취소했다. 미 지상군의 최고지휘관은 미8군사령관으로 총 4명이 재임하였고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0. 1944년 9월, [[태평양 전쟁]] 도중에 [[뉴기니]]와 [[레이테 해전]]에서 미 육군 전투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하여 [[미8군]] 창설. 초대 사령관은 로버트 아이첼버거 중장. 1. 2대 사령관은 [[월튼 워커]] 중장으로 1948년부터 재임 중 한국전쟁 발발. 50년 12월 23일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당시 전쟁 중 한국의 도로 같지 않은 도로를 지프로 과속으로 달리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한미 장성들의 숫자만 해도 상당하다. 2. 워커 중장의 전사 후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이 잠시 미8군을 맡다가, [[제3차 세계대전]]을 벌이자며 폭주하던 맥아더가 결국 해임당하는 바람에, 리지웨이가 대장으로 승진 후 맥아더의 뒤를 이어 [[GHQ|연합군 최고사령관]] 겸 [[유엔군사령부|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그는 [[NATO]] 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다. 3. 리지웨이의 유엔군사령관 부임 이후 공석이 된 미8군 사령관직을 [[제임스 밴 플리트]] 중장이 53년 2월 11일까지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하였다. 그리고 1953년에 대장으로 승진하며 전역한다. 전쟁 중 공군 장교인 그의 아들이 북한으로 폭격 임무를 갔다가 실종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영향인지 전쟁 이후 그는 한미재단을 만들고 한국 [[육군사관학교]]를 지어주는 등 한국에 대한 무한 애정을 쏟아부었다. 4. 그 후임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 당시 [[제101공수사단]] [[사단장]]으로 유명한 [[맥스웰 테일러]] 중장이나, 한국전쟁에서의 경력으로만 보자면 대부분의 회고록이나 한국전쟁을 다룬 책에서 아예 다루지 않은 시기에 재임하여 본의 아니게 [[듣보잡]].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 장군'''이기도 하다. 이후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합동참모의장까지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